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이쇼 덴노 (문단 편집) ==== 건강 악화 ==== ||{{{#!wiki style="margin: -5px -10px" [[파일:다이쇼 천황 제국의회.jpg|width=350]]}}}|| || [[1917년]] 제국의회 개회식에 참석하러 가는 다이쇼 천황 || 천황이 된 이후 다이쇼 덴노는 공무 때문에 건강이 급속히 악화되었다.[* 다이쇼의 건강이 나빠지자 1921년에 20세가 된 장남 [[히로히토]] 황태자가 [[대리청정]]을 수행했다. 히로히토가 덴노가 된 뒤 말한 바에 따르면 요시히토는 황태자 시절만 해도 매우 쾌활하고 잘 돌아다니는 성격이었지만, 즉위한 후 온갖 제약에 속박되는 생활을 하게 되자 괴로워했다고 한다.] 워낙 빡빡한 스케줄로 조금의 자유조차 허용되지 않았고, 답답한 궁중 생활과 엄청난 공무량으로 극도로 바쁜 생활을 강요당했다.[* 다이쇼가 애연가라서 담배를 자주 피운 것도 있었다.] 1913년 그는 재위 1년 만에 [[폐렴]]에 걸려 현재의 닛코 다모자와 고요테 기념공원에서 요양하게 되었고, 완치까지 1개월이 걸렸다. 이후 별장에서 [[요트]], [[승마]], [[한시]] 짓기를 즐기며 어느 정도 숨통이 트였다. 그러나 [[제1차 세계대전]]이 터지면서 국제 정세가 급변했고, 이로 인해 공무량이 급격히 늘어나, 1915년부턴 말을 제대로 못하거나 움직임이 부자연스러워질 정도로 건강이 악화된다. 1916년엔 다이쇼 덴노의 측근 [[오쿠마 시게노부]]가 [[가토 다카아키]] 입헌동지회 총재를 후임으로 추천했지만, [[야마가타 아리토모]]가 [[데라우치 마사타케]]를 추천하고, 원로들이 야마가타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또다시 [[천황]]의 권위가 무시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. 게다가 도쿄 제국대학의 잇키 기토쿠로 교수의 '''천황기관설'''이라는 주장[* 국가의 주권은 국가라는 법인 그 자체에 있고, 천황은 국가의 여러 하위기관들 중 정점에 있는 기관으로서 다른 기관들과 협치하여 다스린다는 주장. 이전까지의 주류 헌법 해석은 '''천황주권설'''로, 천황이 곧 국가로서 절대적이고 신성불가침적인 주권을 갖는다는 해석이다.]이 나오는 등, 갈수록 천황의 권위가 떨어졌다. 이러한 분위기와 공무로 받은 스트레스까지 겹치며 다이쇼는 1917년부턴 거의 공무를 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강이 악화되었고, 1918년부턴 보행도 제대로 못하게 되었다. 1919년부턴 뇌질환으로 식사도 못하고 칙어를 읽지 못하게 되었다. 결국 극도로 건강이 악화된 1921년부터 야마가타를 중심으로 섭정 논의가 활발해졌고, 동년 10월에 [[궁내성]]에선 천황이 건강을 회복할 가망이 없음을 인정했다. 다이쇼 덴노는 섭정 논의에 불만을 표했다고 하지만[* 다이쇼 덴노가 아직 괜찮다고 말한 이야기가 일본 인터넷에 상당히 있는데, 사실이라면 병세를 회복하고 계속 집무를 볼 생각이었던 것 같다. 즉위한 지 겨우 6년 만에 건강이 악화되어 맏아들에게 [[대리청정]]을 맡겨야 하고, 그 전에도 병으로 갑자기 쓰러져서 공무를 별로 못했음을 생각한다면 불만을 표할 만하다.] 더 이상 집무를 할 수 없는 수준까지 건강이 악화되자, 20세가 된 장남 [[히로히토]]가 섭정을 맡아 천황 직무를 대행해야 했다. 이런 사건 때문에 일본 대중들에게 '병약한 천황'이라는 이미지가 각인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